Text 14. 어린시절 맺은 내면의 계약 - 어린시절의 계약
👤 정귀례 📅 2013-04-22 22:17 👁 32
계약은 당신이 출생하는 바로 그 순간부터 시작됩니다. 어떻게 이제 갓 태어난 아기가 자신이 속하게 된 가족의 특수한 상황과 구조를 금세 파악해서 그 안에서 자신이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 직관적으로 이해한다는 것일까요?
세 아이를 둔 젊은 부부의 가정을 한번 생각해 보도록 하지요. 그런데 아이들의 아버지가 암에 걸렸다는 진단을 받고 앞으로 기약할 수 없는 기간 동안 화학 요법과 방사선 치료를 받아야 한다는 의사의 선고를 들었다고 합시다. 그런데 그러한 선고를 받자마자 아내가 임신했다는 소식도 함께 들려옵니다. 아직 태어나지 않은 이 아기는 이들 부부에게 미래를 향해 품어야 할 희망 그 자체가 됩니다. 얼마 후 아주 귀여운 사내아이가 태어나고, 이 아이는 모든 사람에게 더할 수 없는 기쁨이요 커다란 위안이 됩니다. 아버지의 병환 때문에 먹구름 가득한 이 가정에 순하고 조용하며 방긋방긋 잘 웃는 아기의 존재는 마치 기적인 양 여겨집니다.
그런데 아기가 이런 모습을 보이는 것이 그저 우연의 일치에 지나지 않는 걸까요? 그렇지 않으면 식구들에게 기쁨과 위안을 주기를 바라는 모두의 기대를 이 어린 아기가 벌써 알아채고 받아들여서 그렇게 된 것일까요? 거의 울지도 않고 밤에 누구를 성가시게 하지도 않는 유순한 아이, 할머니는 말합니다. "벤이 이렇게 착하고 순하다니 얼마나 잘된 일이니! 만약에 이 아이가 다루기도 힘들고 말도 안듣는 애였으면 지 에미가 어쩔 뻔했어? 안 그래도 골치 썩이고 고생해야 할 일 투성인데 말이야. 이 아기는 정말 사람들을 기쁘게 해주는 예쁜 애로구나."
벤에게 가족들이 기대했던 것은 순하고 조용하며, 지쳐있는 다른 사람들에게 기쁨이 되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아직 어린 아기임에도 벤은 벌써 가족의 아픔을 덜어주고 상처를 보듬는 역할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사실들은 그의 앞날에 무엇을 예고하는 것일까요? 벤은 이를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메시지로 받아들일까요? 앞으로 자신의 인생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돌보고 기쁘게 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될까요? 그리고 만약 벤이 그와 같은 역할을 잘 해내지 못한다고 한다면, 자기 자신에 대해 과연 어떤 느낌을 갖게 될까요?
태어난 지 채 다섯 달도 안된 나이에 벤은 이미 타협의 여지가 없는 매우 강력한 구속과 계약 아래 놓이게 된 것입니다. 바로 순하고 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 벤이 그러한 역할을 잘 해낸다면 아마도 어른들에게 귀여움도 받고 인정도 받을 수 있겠지요.
저는 지금 벤의 부모가 벤이 그렇게 되도록 의도적으로 몰아넣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아마, 자신들이 기대하는 바를 벤이 자기 내면에 단단히 새겨넣었을 뿐 아니라 그것을 일종의 계약으로까지 발전시키고 있었다는 사실은 전혀 모르고 있었을 테니까요. 그들이 당시 마음에 담고 있었던 것은 미래에 대한 불확실함, 두려움, 고통, 그리고 어쩌면 사랑하는 남편이자 아이들 아버지를 잃게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었을 겁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태어난 건강하고 귀여운 아기는 그들에게 말로 다할 수 없는 사랑과 행복을 불러일으켰을 것입니다. 그러나 벤이 태어난 시점, 그 당시 가족에게 일어나고 있던 일들, 그리고 그 결과 벤에게 주어진 메시지들은 앞으로 이 아이가 성장해 가면서 선택할 것들, 맺게 될 관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습니다. 어느 누구를 탓하자고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단지 이 아이가 처한 상황이 문제라면 문제겠지요.
부모들은 스스로 모범을 보인다거나 혹은 그저 기대를 드러낸다거나 하는 방식으로 당신이 어떠어떠하게 되기를 가르쳐왔습니다. 가족이 당신에게 어떤 기대를 보였든지 간에, 당신은 가족 안에서 사랑을 받고 소속감을 얻기 위해 가능한 한 그 기대를 충족시키려고 애썼을 것입니다. 스스로 자기 마음속에 여러 가지 계약 사항을 쓴 다음, 그 계약 사항을 하나하나 지키려고 고군분투하였겠지요. 그리고 어른이 된 뒤 주변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면서도 아마 똑같은 행동을 반복하였을 테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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